루게릭병과 함께 55년…호킹의 우주엔 장애가 없었다
"최악의 신경질환을 극복하고 우주의 가장 심오한 비밀을 탐구했으며 전 세계에서 인간 정신력의 상징이 된 물리학자"(워싱턴포스트). "현대 우주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수백만 명의 세계인에게 영감을 준, 과학의 하늘에서 가장 빛나던 별."(가디언) 지난 14일 별세한 영국의 세계적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에 대한 언론들의 보도다. 76세. 자녀들은 그가 케임브리지의 자택에서 숨졌다고 이날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아버지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다면 우주는 대단한 곳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를 영원히 그리워할 것"이라고 밝혔다. 21세 때'2년 시한부'선고받고 극복 호킹은 뉴턴과 아인슈타인 다음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과학자다. 학자들에게는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을 결합한 우주론으로 이름 높지만 일반인에게는 루게릭병으로 뒤틀어진 신체로 더 유명하다. 호킹은 1942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열대병 전문 의사인 아버지와 적극적인 자유당원인 어머니 사이에 4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 모두 옥스퍼드대 출신이었고 그는 17세에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자연과학 분야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62년 우주론과 일반상대론을 공부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원에 입학했다. 앞서 그는 대학 졸업반 시절부터 비틀거리거나 넘어지는 증상을 보였다. 검사 결과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는 희귀병인 퇴행성운동신경질환(일명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의사는 2년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판정을 내렸다. 21세 때인 63년의 일이었다. 우울하게 지내던 그는 신년 파티에서 제인 와일드라는 젊은 여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들의 사랑은 그에게 삶의 의지를 북돋웠으며 두 사람은 65년 결혼했다. 그는 발병 확인 후 55년간 수많은 업적과 일화를 남겼다. 그의 병은 특히 서서히 진행되는 매우 예외적인 사례였던 것으로 드러났지만 자신의 의지와 탐구심 덕분이기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두 손가락만 겨우 움직이는 상태로 휠체어에 부착된 음성합성기로 대화를 나누고 강연을 했다. 말년에는 뺨 근육의 움직임만으로 컴퓨터를 작동하며 연구를 계속한 불굴의 인물이었다. "미니 블랙홀로 노벨상 못 타 아쉽다" 그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갑자기 나는 깨달았다. 내 사형 집행이 연기된다면 할 일이 너무 많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이를 계기로 물리학 연구를 진지하게 시작한 뒤 그는 선언했다. "나의 목표는 단순하다. 우주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왜 현재와 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지, 애당초 왜 존재하는지를 말이다." 그는 66년 박사 학위를 받은 뒤 70년 첫 업적을 발표했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와 함께 블랙홀의 수학을 우주 전체에 적용해 먼 과거에 특이점이 존재했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시공간이 무한대로 휘어지는 특이점으로부터 대폭발(빅뱅)이 일어나 지금의 우주로 팽창했다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업적은 74년 발표된 소위 '호킹 복사'였다. 미니 블랙홀이 열을 방출하고 결국에는 사라질 것이라는 내용의 양자이론을 도출한 것이다. 블랙홀이란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중력이 강한 천체를 말한다. 보통은 태양 질량의 세 배를 넘는 것이지만 우주의 초창기에 만들어진 미니 블랙홀은 그렇지 않다. 양성자보다 작은 크기에 질량은 100억t인데 전 우주에 퍼져 있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나중에 그는 "이것이 발견되면 노벨상을 받았을 텐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이런 공로 등으로 그는 74년 32세 때 영국 왕립협회의 사상 최연소 회원으로 선출됐다. 5년 후엔 케임브리지대의 루카스 석좌교수가 됐다. 아이작 뉴턴, 폴 디랙 등이 역임한 가장 명예로운 자리다. 두 번째 부인의 학대 혐의 조사 불응 그의 업적은 80년대까지 계속 발표됐다. 우주 인플레이션 이론은 어린 우주가 초고속으로 팽창하는 시기를 겪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82년 호킹은 양자 요동-물질 분포의 미세한 변이- 덕분에 초팽창 과정에서 우주에 은하들이 퍼져 나갈 수 있음을 보였다. 이들 작은 파문이 별과 행성, 생명체의 씨앗을 낳았다는 것이다. MIT의 물리학자 막스 테그마크는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이디어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를 대중 스타로 만든 것은 '시간의 역사'다. 88년 발간된 이 책은 40개국의 언어로 번역돼 1000만 부가 팔렸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 놓고 읽지 않은 목록에서도 1위로 꼽힌다. "여자는 완전 미스터리" 성차별 논란도 그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주론에서 특히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상, 울프상, 코플리 메달, 기초물리학상을 받았지만 노벨상은 받지 못했다. 이는 실험적 업적이나 실험으로 확인된 이론에 대해서만 상을 주는 탓으로 해석된다. 호킹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첫 부인과는 세 자녀를 두었으나 92년 파경을 맞았다. 호킹의 상태가 악화되며 그의 요구 사항은 늘어나고 병세에 대한 논의를 거부한 탓이라고 제인은 말했다. 그녀는 호킹을 "거대하고 성마른 자아를 지닌 어린애"라며 자신들이 "주인과 종의 관계"가 돼 갔다고 썼다. 호킹은 별거를 시작해 자신의 간호사인 일레인 메이슨에게로 떠났다. 두 사람은 법적 이혼이 마무리된 5년 후에 결혼했다. 11년 만에 이혼으로 끝난 두 번째 결혼에 대해 그는 "정열적이고 열렬했다"고 표현했다. 메이슨은 결혼 생활 중 호킹을 학대, 폭행했다는 혐의로 여러 차례 수사를 받았으나 호킹이 조사에 협조하지 않은 덕에 사건은 종결됐다. 그는 논란을 즐기는 인물이었으며 성차별주의자이자 여성혐오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여자는 완전한 미스터리"라는 말도 남겼다. 또한 철저한 무신론자로 이름 높다. "뇌는 부속이 망가지면 작동이 멈추는 컴퓨터라고 나는 본다. 망가진 컴퓨터를 위한 천국이나 내세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어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에 불과하다." 조현욱 과학과소통 대표